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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김병학컬럼]소통은 말 뒤의 신호를 듣는 일이다

작성자 : 사람과사회 작성일 : 2026-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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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하는 크리스천(2)
김병학 목사(주님의 교회 담임, 그레이스 미션 대학교 & 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교수).

어떤 밤에는 방 안의 불은 꺼져 있는데 휴대전화 화면만 오래 켜져 있다. 누군가는 메시지를 썼다가 지운다. “나 너무 힘들어.” 다시 지운다. “혹시 지금 통화할 수 있어?” 그것도 지운다. 결국 남는 말은아무것도 아니야.

 

젊은 여성의 자살률이 높아지고 있다는 통계는 숫자가 아니다. 그 지워진 문장들의 흔적이다. 말하지 못한 고통, 듣지 못한 공동체, 연결되지 못한 도움 요청이 그 뒤에 있다.

 

2025 9월 보도된 기사에 따르면, 고려대 의대 이요한 교수 연구팀은 세계보건기구와 유엔 자료를 바탕으로 2001년부터 2020년까지 55개국 청년 자살률을 분석했다. 그 결과 한국 20~39세 여성 자살률은 2020년 기준 인구 10만 명당 18.9명으로 조사 대상국 가운데 가장 높았다. 일본 12.0, 미국 6.8명보다도 훨씬 높다. 특히 2016년 이후 한국 청년 여성의 자살률은 해마다 8% 넘게 증가했고, 세계 평균 여성 청년 자살률 5.07명과 비교하면 거의 네 배에 가까웠다. 연구팀은 이를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국가적 위기로 보았다.

 

이 수치를 보며 우리는 물어야 한다.

왜 젊은 여성들은 말해도 닿지 못하고, 도움을 청해도 연결되지 못하는가.

자살을 개인의 나약함이나 충동으로만 설명하면 안 된다. 물론 한 사람의 내면에는 타인이 다 알 수 없는 어둠이 있다. 그러나 그 어둠이 깊어지는 과정에는 반드시 관계와 환경이 있다. 말할 수 없는 분위기,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 도움을 청해도 실제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제도. 그런 것들이 겹칠 때 위기는 조용히 커진다.

소통은 말을 잘하는 기술이 아니다. 소통은 누군가의 고통을 알아차리고, 그 신호 앞에서 멈추고, 실제 응답으로 이어지는 사회적 능력이다. 말은 있었는데 응답이 없었다면, 그것은 소통이 아니다. 상담 창구는 있었지만 삶의 자리까지 닿지 못했다면, 그것도 충분한 소통이 아니다.

 

가정은 가장 가까운 곳이지만, 때로 가장 먼저 침묵을 배우는 곳이 된다.
사회는 많은 말을 요구하지만, 정작 약함을 말할 자리는 좁다.
제도는 도움을 약속하지만, 그 약속이 한 사람의 밤까지 닿지 못할 때가 많다.

 

문제는 그들이 말하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우리가 그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는가에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움을 요청한 사람을 탓하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 도움을 청했다면, 그는 이미 살기 위해 움직인 사람이다. 그 요청이 끊어지지 않게 붙잡는 것이 사회의 책임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 끊어진 고리를 다시 이어야 할까.

정부, 학교, 직장, 의료 체계가 당연히 응답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사람은 행정 절차 속에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산다. 자주 마주치는 얼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 말없이 곁에 앉아주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교회를 말할 수 있다. 다만 조심스럽게 말해야 한다. 교회가 지금 그 역할을 잘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많은 교회는 아픈 사람의 말을 충분히 듣지 못했다. 우울을 믿음 부족으로 오해했고, 불안을 감사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단정했으며, 여성의 고통을참아야 할 몫처럼 다룬 적도 많았다. 어떤 교회는 젊은 여성들에게 쉼보다 봉사를, 질문보다 순종을, 자기 목소리보다 조용한 헌신을 먼저 요구했다. 그런 교회라면 대안이 아니라 또 하나의 침묵 구조가 된다.

 

그럼에도 교회가 대안이 될 가능성을 말하는 이유는, 교회가 본래 붙들어야 할 인간 이해 때문이다. 사람은 성과로 환산될 수 없는 존재다. 쓸모가 줄었다고 가치가 줄어드는 존재도 아니다. 실패했기 때문에 버려지는 존재도 아니다. 한 생명은 조건 없이 존중받아야 한다. 이것은 종교 안에만 머물 말이 아니라, 지금 사회가 잃어버린 가장 기본적인 윤리다.

 

교회가 이 믿음을 실제 관계로 살아낸다면, 교회는 다시 말할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있다. 평가받지 않고 울 수 있는 자리. “네가 이상한 게 아니야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자리. 고통을 설명하지 않아도 잠시 숨 쉴 수 있는 자리. 혼자 견디던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불리는 자리. 결국 사람을 살리는 것은 거창한 구호보다 그런 관계다.

 

교회가 정말 교회다우려면 고통을 빨리 해석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왜 그렇게 됐는지를 묻기 전에얼마나 외로웠는지를 들어야 한다. 아픔을 교훈으로 만들기 전에 한 사람의 삶을 먼저 붙들어야 한다. 신앙의 언어가 사람을 살리려면, 그것은 정답처럼 던져지는 말이 아니라 곁을 지키는 몸짓이어야 한다.

 

젊은 여성들의 자살률 증가는 우리 사회가 덜 듣고 있다는 증거다. 더 정확히 말하면, 듣고도 충분히 응답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가정은 감정을 훈계하기 전에 들어야 한다. 사회는 경쟁과 평가만으로 사람을 몰아붙이는 방식을 멈춰야 한다. 제도는 도움 요청을 접수하는 데서 끝나지 말고 실제 삶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자신이 잃어버린 역할, 곧 아픈 사람의 곁이 되는 일을 다시 배워야 한다.

 

누군가나 힘들어라고 말할 때, 그 말은 단순한 하소연이 아닐 수 있다. 구조 요청일 수 있다. 그때 필요한 것은 빠른 조언이 아니다. 판단도 아니다. 먼저 멈추는 일이다. 바라보는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 일이다.

지금 내가 어떻게 함께하면 좋을까.”

어쩌면 한 사람은 바로 그 한 문장 때문에 오늘을 건널 수 있다. 소통은 거기서 시작된다. 그리고 생명을 살리는 공동체도, 바로 거기서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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