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김병학목사의 소통하는 크리스천-소통은 변명이 아니라 듣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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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2026 북중미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 경기를 보던 많은 사람이 답답한 마음에 리모컨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축구는 질 수 있다. 아무리 준비해도 한순간의 실수로 흐름이 무너질 수 있고, 상대가 우리보다 더 좋은 경기를 할 수도 있다. 패배 자체가 낯선 일은 아니다.
그런데 한국 대표팀이 남긴 것은 단순한 패배의 아쉬움이 아니었다. 점수보다 더 깊게 남은 것은 허탈함이었다. 우리가 본 것은 지는 팀이 아니라, 서로 통하지 않는 팀의 얼굴이었다.
특히 남아공전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경기였다. 전문가도, 해설자도, 관중도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 선수가 저 자리에 서 있는지, 왜 저 전술을 끝까지 붙잡는지, 경기 흐름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왜 벤치는 그렇게 늦게 움직이는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경기장 안의 선수들도 확신을 갖고 뛰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몸은 분명 움직이고 있었지만, 방향은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었지만, 한 팀이라는 느낌은 약했다.
남아공 감독은 한국의 전략을 읽고 있었다고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그러나 한국 감독은 상대의 전략을 충분히 읽지 못한 채 자신이 준비한 방식만 고집하는 것처럼 보였다. 축구는 혼자 하는 경기가 아니다. 상대가 있고, 흐름이 있고, 현장에서 바뀌는 변수가 있다. 그런데 자기 전술만 붙잡는 순간 전략은 확신이 아니라 고집이 된다.
더 아쉬웠던 것은 경기 후의 태도였다. 리더십에서 정말 무서운 것은 실패 그 자체가 아니다. 실패를 실패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실패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무감각이다. 작은 공동체의 리더도 자신의 판단이 구성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야 한다.
하물며 국가를 대표하는 팀의 감독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리더의 말 한마디는 변명이 될 수도 있고, 회복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식의 태도는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듣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들린다. “나는 너희의 답답함을 들을 생각이 없다.”
언론에서는 감독의 선수들과의 소통 문제, 과거 방식에 머문 권위주의, 특정 선수들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까지 거론했다. 물론 밖에서 모든 사정을 다 알 수는 없다. 라커룸 안의 분위기나 실제 대화의 결을 외부인이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공동체가 흔들릴 때 사람들은 결과보다 먼저 리더의 태도를 본다. 리더가 듣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는지, 책임지고 있는지를 본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교회를 떠올리게 된다. 교회는 과연 다른가.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질문과 아픔을 읽지 못한다면, 우리만의 방식으로만 뛰는 팀이 된다. 세상은 공정함과 투명함을 묻고, 다음 세대는 납득할 수 있는 소통을 요구한다. 그런데 교회가 “우리는 늘 이렇게 해왔다”는 말만 반복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둔감함일 수 있다. 상대를 읽지 못한 전술이 경기장에서 통하지 않듯, 시대와 사람의 마음을 읽지 못한 교회의 방식도 세상 속에서 힘을 잃는다.
솔직히 말하면, 한국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자주 본다. 강단에서는 말씀이 선포되지만 시대를 읽지 못하고, 성도들의 질문은 충분히 들리지 않는다. 회의는 열리지만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고, 의견을 묻지만 실제 결정에는 잘 반영되지 않는다. 청년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지 말하고 있는데, 어른들은 “요즘 세대가 문제”라고만 말한다. 성도들이 상처를 말하면 리더십은 “교회를 흔들지 말라”고 답한다. 여기까지 오면 그것은 소통이 아니라 지시다. 대화가 아니라 통보다.
교회가 세상과 다르다고 말하려면, 먼저 말하는 방식부터 달라져야 한다. 세상도 이제 권위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질문한다. 납득하고 싶어 한다. 함께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교회가 여전히 “순종하라”는 말만 앞세우고, 합리적인 질문마저 불순종으로 몰아간다면 다음 세대는 조용히 떠날 수밖에 없다. 청년들이 믿음을 잃어서만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다. 말할 자리가 없어서 떠난다.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떠난다. 말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에 떠난다.
축구팀도 하나의 공동체다. 교회도 그렇다. 감독 혼자 뛰는 팀은 없다. 목회자 혼자 세우는 교회도 없다. 선수의 몸이 움직이려면 전술을 이해해야 하고, 성도의 마음이 움직이려면 교회의 방향을 납득해야 한다. 아무리 옳은 말도 일방적으로 던져지면 벽이 된다. 아무리 좋은 비전도 함께 듣고 함께 고민하지 않으면 구호로만 남는다. 신뢰 없는 비전은 사람을 움직이지 못한다.
권위주의의 민낯도 여기서 드러난다. 권위는 직함에서 나오지 않는다. 목사라는 이름, 장로라는 직분, 감독이라는 자리만으로 사람을 따르게 할 수는 없다. 진짜 권위는 책임지는 태도에서 나온다. 일이 잘됐을 때는 공동체의 공으로 돌리고, 잘못됐을 때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에게 권위가 생긴다. 반대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선수 탓, 성도 탓, 시대 탓, 세상 탓으로 돌리는 순간 리더십은 힘을 잃는다. 사람들은 말보다 태도를 먼저 본다.
성경에서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한 것은 화려한 말솜씨가 아니었다. 힘도 아니었고, 명예도 아니었고, 오래 사는 복도 아니었다. 그는 백성을 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듣는 마음”을 구했다. 참 놀라운 장면이다. 왕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말하는 능력이 아니라 듣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오래전에 이미 말하고 있었다. 듣지 않는 왕은 백성을 잃는다. 듣지 않는 리더는 사람을 잃는다. 듣지 않는 교회는 세상의 신뢰를 잃는다.
소통은 기술이 아니다. 태도다. 더 많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듣는 것이다. 상대를 설득하기 전에 먼저 상대의 아픔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 것이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겸손,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마음, “우리가 함께 길을 찾아보자”는 자세. 거기서 소통은 시작된다.
한국 축구가 다시 서려면 전술 이전에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프로그램보다 먼저 귀를 열어야 한다. 행사보다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한다. 말하기보다 먼저 삶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패배보다 무서운 것은 배우지 않는 것이고, 실수보다 더 아픈 것은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소통하는 교회는 말이 많은 교회가 아니다. 듣는 교회다. 책임지는 교회다. 그리고 다시 묻는 교회다. “우리는 정말 듣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 정직하게 설 때, 교회는 다시 사람들의 마음 가까이 갈 수 있다. 어쩌면 그때부터 우리는 다시 한 팀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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